섹스와 음식을 목적으로 전쟁을 하는 과정 위에 만들어진 부산물들이 우리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언제나 인정할 것인가.
<스카이폴>을 본 이후에 영화의 잔상이 며칠이고 남아있다. IMAX로 본 탓도 있지만, 아델이 부른 "스카이폴" 때문. 아델 목소리가 좋다는게 아니라(물론 그건 맞지만), 이 노래가 M(주디 덴치)의 부채의식의 산물이라는 점이 그렇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에서 가장 큰 상처를 입었던 사람은 M이었다. 실바는 "당신의 죄를 기억하라"며 M을 협박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M이 꾸었을 악몽이었을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저승에서 아델의 목소리를 통해, "이것이 끝입니다. 나는 그 끝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왔고, 그 끝을 꿈꿔왔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빚을 졌고, 그 빚을 오랫동안 갚고 있지 않습니다." 라며 고백한다.
이 영화의 좋은 점이야 말할 수 없이 많은데, 그것이 시리즈를 알고 있을 때 더 의미가 풍성해진다는 점은 아쉽기도 하고 좋은 점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그런 인내를 잃기도 했고, 그런 인내를 바란다는 것이 건방지기도 한 일이니까. 하지만 "시리즈"라는 특성과 관계없이 가장 안타까운 점은, <스카이폴>의 고전적 연출. 영화는 매번 인물들이 앞으로 뛰어놀 배경의 철저하게 제시하는 지극히 고전적인 연출/촬영(로저 디킨스 쨔응 ㅜㅜ)을 선보이고 있는데, 이제 우리는 이러한 연출/촬영을 첩보-사건의 맥을 깨게한다는 점에서 지루한 것으로만 여기게 되어버렸다. 즉, 현대 영화는 "얼굴들의 영화"이고 이것은 인물들이 현재 개입하고있는 사건의 흐름을 중시한다. 그것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지만, 새 챕터에 들어가기 전에 그 공간의 공기를 체득하고, 그 이후에 벌어지는 사건이 어떤 것인지 알아갔던 스타일은 이제 발 붙이기 어려워져버린 것은 아쉬운 일이다(하지만 IMAX는 어쩌면 이 점에서 강점을 보이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2012/09/01 13:18
<비행운>(김애란) 단상 책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서른], [하루의 축]을 중심으로 한 단상

내러티브의 생리상 독자는 내러티브 속 인물에 대한 정보를 점점 더 많이 알아갈 수밖에 없다. 내러티브 속 주인공이 처음에 하던 행동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그 행동의 동기나 이유를 알게될 때 감동을 얻게될 수 있다. 나는 지금 어쩌면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의 사례를 보자.
택시운전수가 자기 혼자만 있는 택시 안에서 "워 더 쭈어웨이 짜이날?" 이라는 문장을 어색하게 읊는다. 택시 안에는 자기 혼자밖에 없고 그저 회화 교재일 것으로 예상되는 테이프에서 나오는 음성을 따라하면 되는 일인데 그가 어찌 저렇게 어색하게 읊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추측컨대 그저 한국에서 인생을 실패한 어느 중년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중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나보다. 그런데 나이가 든 탓에 준비를 하는 게 어색한가 보다. 왜, 원숭이들도 늙은 수컷 원숭이가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최후까지 거절한다고 하지 않던가.
이야기는 우둔해보이는, 세상에서 실패한 나머지 안쓰러워 보이는 이 사내의 사연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간의 실패담은 구체적인 세부사항만 다를 뿐 예상과 비슷하다. 하지만 그 회화 교재인 것으로 보였던 테이프가 어떤 사연을 갖게 된 것인지를 알게되면서부터 이야기가 전해오는 감정은 사뭇달라진다. 테이프는 자신이 사랑했고 또 자신을 사랑해주던 유일한 여인, 한국에 돈을 벌러 온 조선족 여인이 손수 녹음을 해준 것이다. 택시운전수가 그녀에게 점수도 딸겸, 반 농담 반 진담삼아 자신도 중국어나 배워 중국가서 살겠다고 말한 것을 철썩 진담으로 여겨 손수 녹음을 해준 것이다. 운전수는 공을 들여야 했던 연애 초반부에만 그 테이프를 따라 하는둥 마는둥 했고 여자는 죽었다. 여자가 죽은 이후 그에게 이제 이 테이프가 보인다. 그는 테이프를 재생해서 혼자만 있는 택시에서 어색하게 읊조린다. 여자가 "워 더 쭈어웨이 짜이날?(제 자리는 어디입니까?)"하고 한번 읖으면 그가 "워 더 쭈어웨이 짜이날?(제 자리는 어디입니까?)"하고 어색하게 따라한다. 우리는 이 부분에 와서야 그가 어색하게 따라하던 문장의 뜻과 그 사연을 알게된다.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했던, 지방에서도 서울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찾지못했던 두 사람의 물음. 그 물음은 텅빈 공간을 채우지만 돌아오는 메아리는 없다. 그들은 서로에게 자신의 자리가 어디냐고 묻지만 답은 없다. 대답이 없는 서로에게 "리 쩌리 위안 마?(여기에서 멉니까?)"하고 묻지만 이 역시 답이 없다. "제자리는 어디입니까?", "여기서 멉니까?" 하고 답은 없이 외치기만 하는 이 둘 사이의 대화 아닌 대화는, 택시운전수가 그녀를 기리는 제의적인 행위인 동시에, 세상 어디에서도 번듯한 사회적 지위를 찾지 못했던 이들의 넋두리로서 이중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물음은 어지간한 노력을 하더라도 별반 현실이 바뀌어질 것 같지 않은 계급상승의 사다리가 턱없이 좁아진 현대 한국사회에서 꽤 울림을 주는 것이다. [서른]에 나오는 학원선생님은 고시원에서 재수하여 서울 소재 J대학교 불문과를 나왔지만 학자금 대출 때문에 빚만 떠안게 되었고 취직은 쉽지 않다. 그녀는 아르바이트를 나가는 학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데 최종적 결과물이 어떤 형태인지 알고 있을 때 찾아오는 부조리. 모든 행위를 무화시켜 버리는 그 비참함.
그렇다면 그녀는 자라서 무엇이 될까? 그녀는 아마 [하루의 축]에 나오는 일용직 청소노동자 기옥씨가 될 것이다. 오십대 중반까지 이렇다할 보수 없이 고된 일용직에 시달려야 할 것이고, 어학연수비를 마련하기 위해 범죄자가 된 아들을 두게 될 것이며 그 아들로부터 '엄마, 사식 좀'이라고 달랑 다섯 글자만 씌여진 편지를 받게될 것이며, 그래서 인생에 남은 것이라곤 원형탈모증밖에 없게될 그런 비참한 아주머니가 될 것이다.
이렇듯 김애란의 소설집 <비행운>의 세계는 자신의 세계 안에서 주인공들이 돌고도는 폐쇄적인 구조를 지녔는지도 모르겠다. 노력하면 성공을 거머쥔다는 신화가 속절없어진 시대의 닫힌 구조. 작가는, 독자들이 이 닫힌 구조 속의 주인공들의 사연에 대해 간신히 알아차리기 시작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나는 이 태도가 좋다. 그들의 사연에 대해서 갓 알고났는데 이들이 너무나도 답이 없는 상태라 뭐라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없는 상황이 좋다. 우리는 해결책이 없어 비상구를 찾지 못하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답이 없을 것으로 보이는 물음은 불안감을 던져준다. 작가는 자살을 이야기 하지 않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막 끝나고 나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파국에 걱정이된다. 극단적인 선택, 그러니까 자살이 아니고서야 저 절망적인 공간에서 벗어나올 방법이 없는 것 같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더라도 선택지는 <비행운>에 제시된 주인공들이 고작이며, 따라서 파국의 선택지는 유예되었을 따름이다. <비행운>은 독자에게 이러한 감정의 여운을 남긴다. 물론 이러한 감정적 여운을 갖고 책장을 덮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우리의 삶을 위해서 능동적으로 행할 수 있는 무엇은 없다. 그렇지만 내러티브라는 장르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서 보다는 문제를 드러내는 데 더 효과적인 매체 아니던가.
속해야 한다고 느끼는 공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 공간이 변하는 모습을 멀뚱하니 쳐다만 보고 있는 상황,
우주선에 감금되어 유리창 너머로 멀어져가는 지구를 봐야하는 강제적인 상황처럼,
외계인이 된 듯한 이 기분.
종이로 되어 만질수 있는 형태로 된 책은 다시 읽을 게 아니라도 책장에 꽂혀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 책등에 적힌 제목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래 저런 이야기도 있었지. 그럼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 생각을 상기시키는 탓에 이정표로서 구실을 톡톡히 하는 것이다. 그래서 e-book으로 책을 보는 경험이 얼마나 쾌적해지던간에, 홀로그램으로 책장을 구현할 수준이 되지 않는 이상은 종이책을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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